소중한 순간/여행 하다

[상해] 왜 남자는 길을 묻지 않는가

5eadme 2018. 3. 26. 00:39

2016. 10. 15. 23:30

 

조금 예전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올해 퇴사를 앞두고 우리는 짧은 휴가를 계획했다.

호주에 나가는 것이 결정된 마당에 무슨 휴가냐 싶겠지만, 내가 다녔던 회사는 해외여행(숙박)에 대한 복지가 무척 후한 편이었다.

이미 받은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아깝고 때마침 JTBC <차이나는 도올>의 열렬한 애청자였기 때문에 중국을 가자고 마음 먹었다. 그렇게 결정한 상해 여행으로 나는 처음 대륙땅을 밟았다.


워낙 짧은 일정이라 딱히 준비를 하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 이런저런 회사 업무로 정신이 없던 터라 아무런 대책없이 상해에 도착했다. 우리는 그래도 참 잘 논다. 중국에서 구글맵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에도 큰 문제는 없었다. 여행에 관한한 트립어드바이저(TA)를 선호하는 우리는 몇번 작은 난관에 부딪혔을 뿐이다.

TA는 구글맵 연동이니 당연한 결과... 그래도 시내에서는 잘 다녔지만, 결국 돌아오기 전날 크게 한번 허탕을 쳤다.


한국 관광객들이 잘 안가는 곳 중에서 매력적인 장소로 PPAC라는 곳이 있다.

 

'상하이 프로파간다 포스터아트 센터'의 줄임말로,

풀어써도 도무지 감이 잘 안오는 이름의 박물관인데 평소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꽤 흥미롭게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중국공산당 선전포스터들을 전시해놓고 실제 판매도 한다. (엄청비싸다, 공산당도 돈은 좋아한다) 

우리는 이미 도올선생 강의로 상식 충만한 상태였고, 어딜가나 지식욕 돋는 수다쟁이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즐겁게 관람했다.

다만 여기까지 이르는 길이 퍽 우여곡절이었다.

 

트립어드바이저의 오류라고 하기는 좀 무리가 있고 구글맵 연동상 중국어 인식에 문제가 있던거 같다. 

우리말로는 모두 '화'라고 발음하지만, 한자로는 엄연히 다른 꽃 화(花), 빛날 화(华) 두 가지를 TA에서 똑같이 인식하고 우리를 생뚱맞은 곳으로 안내한 것이다. 미국에 똑같은 이름의 도로가 각 주마다 수십개 있듯이 대륙에도 같은 이름의 길은 엄청나게 많다.

상해에도 두 개의 화산로(花山路, 华山路)가 있다. 심지어 둘은 서로 어마무지하게 떨어져 있다.


그렇게 두 번 환승하며 전철만 1시간 30분을 타고 간 뒤 내려서 30분을 걸어가 황당한 곳에 도착했다. 그 멍청한 여행을 하면서 우리는 시내를 벗어나 외곽지역을 본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고 심지어 쏟아지는 비조차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갈때부터 이상했다. 현지인들도 거의 다 내리고 몇 명 남지않은 전철을 타고 한참을 달렸고, 역에 내리자마자 싸늘한 기운이 몸을 휘감았다.

 

그렇게 관광객은 단 한명도 지난 적 없을 듯한 동네를 지나 우리는 '가스충전소'에 도착했다. 너무나 정확하게 TA에 나온 위치랑 일치해서 한동안은 박물관이 사라진거라 생각하고 멍청하게 서있었다.

 

남자들은 결코 길을 물어보는 법이 없다. 보통은 자존심 문제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물어봐도 알아들을 수 없으니 묻지 않았다.

그 상태로 우리는 동네를 30분간 더 둘러보고 망연자실 가스충전소로 걸어 들어가 영어로 쓰여진 작은 쪽지를 받았다.

 

그 내용인즉,

"여기 아니야, 아래 주소로 가렴"

 

생각보다 우리 같은 외국인이 많은 눈치였다. 쪽지를 준 여자에게 무작정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보상이 이 작은 종이쪼가리면 너무나 곤란하다고...

영어는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가 마음을 헤아려줄리 없었다.

우리는 반나절을 잡쳤고, 돌아오는 길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어로 쓰여진 착한 쪽지는 문제의 PPAC가 우리 숙소 바로 옆에 있다고 친절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다소 거창한 제목으로 시작했지만 남자들이 길을 묻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성취감 때문이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그 쾌감을 양보하기 쉽지 않다. 

 

다만 현대에 와서 지적받는 이유는 그 '길을 찾는다는 행위'가 더 이상 높게 평가받는 성취가 아니라는 점이다. 

얄팍하게 추측하자면,

남성은 원시사회에 사냥을 주로 담당하면서 목적지를 찾아가는 행위에서 기쁨을 느끼도록 프로그래밍 된 것이 아닐까.

구글맵도 없이 과거를 보기위해 반도를 가로지르고 세로지르면서 조상님들은 스스로를 합리화 할 근거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길을 찾는다는 행위의 무게는 생각보다 역사적이다.

그렇게 유전된 '길을 찾는 유전자'가 내 입을 걸어 잠그고 길거리를 배회하게 한 범인이라면 안도감보다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그 유전자는 나에게 얼마나 많은 우려와 짜증섞인 말들을 감내하게 하였는가 (물어보라고 할 때 물어보자).

결국 구글맵과 네비게이션은 조금 쪼다같은 남자다움의 새로운 표상이다.

고마운 녀석, 부디 주소인식만 틀리지 말아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