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장면/영화 보다

히스 레저의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 기사 윌리엄

5eadme 2018. 3. 27. 22:32

 

2016. 12. 3.

 

퍼스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을 한 명 뽑는다면 어렵지않게 ‘히스 레저’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본격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해 <다크 나이트>의 조커 연기로 영화사에 기록적인 순간을 남긴 이 배우는 코테슬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장례식이 치러지기도 했던 이 해변은 지금도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평화롭고 고립된 퍼스의 한적함과 바다를 그는 무척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해변에 앉아 있거나 매일 아침 서핑을 할 때 진정 행복했다”

(I would have been really happy sitting on a beach or surfing every morning)

 

- 그의 인터뷰가 담긴 책 [Heath Ledger] 중 -

 

 

누구나 태어난 순간 고향이 생기지만 그것을 특별하게 기억하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다. 화려하지만 차가운 할리우드 생활 속에서 그가 왜 그토록 퍼스를 그리워했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움’이란 단어를 이 도시와 연결 짓는지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시간이 흐르고 퍼스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그 느낌은 조금씩 뚜렷해진다. 

 

히스 레저의 꽃미모 시절로 더 유명한 <기사 윌리엄>을 썩 좋은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영화는 특별한 영상미도 없으면서 하릴없이 길다. 처음에는 눈을 사로잡는 마상창술 시합도 몇 번 보다 보면 똑같은 패턴의 반복이다. 귀족→하녀→대장장이 순으로 일반적인 캐스팅 기준을 역행하는 미모의 순서가 이 영화가 코미디라는 점을 희미하게 기억하도록 한다. 그 정도로 이 영화는 개그코드마저 그냥 그렇다. 하지만 뒤늦게 범작(凡作)인 이 영화를 소개하는 이유는 히스 레저가 말 타고 인생역전하는, 말 같지도 않지만 시기 적절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지붕수리공의 아들로 태어난 윌리엄(히스 레저 역)은 우연한 기회로 그의 주인 대신 마상창술 시합에 참가하여 우승하게 된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벌인 일이었지만, 자신의 재능과 가능성을 단박에 알아차린 그는 귀족으로 신분 세탁을 감행한 뒤 대회에서 승승장구한다. 출중한 실력 앞에 사람들은 그의 출신성분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그는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성공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철저하게 정체를 감추는 일 뿐이다.

 

윌리엄과 달리 나는 아직까지 제대로 말을 타본 적이 없다. 특히 호주도 아닌 한국에서라면 제주도 조랑말 체험이 국민적인 표준이라 말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장담컨대 한국에는 말을 타본 사람보다 경마장에 가본 사람의 숫자가 더 많을 것이다. 이처럼 말 타는 일이라면 특히 후진국인 한국에서 말 타기로 대학을 갔다는 비선실세 가족이 끊임없이 화제다. 그 스포츠의 이름은 마장마술(馬場馬術)로, 한 글자 한 글자 적어보고 나서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신비로운 이름을 가진 종목의 스포츠를 즐기며 그들은 정말 마술같이 명문대에 턱턱 붙었다.

 

영화에서처럼 그들이 말을 타고 스스로 인생을 개척한 경우라면 분명 자랑스러워야 할 테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한국에서의 사건은 영화보다도 퍽이나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의 자유와 능력을 토대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들은 돈과 권력으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성적은 조작되고 문제를 감시 할 시스템은 무너졌다. 지금은 2016년이다. 신분제는 철폐되었지만 경제력에 기반을 둔 ‘계급’은 아직 사회에 만연하다. 하물며 그들의 특권조차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물려받은 것이고, 그마저 불법적인 방법으로 취득한 것이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분노한다.

 

대한민국에서 단 하나의 공정하고 공평한 출발선이라고 평가받는 수능을 치른 학생들도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실망과 허탈감을 호소한다. 어른들은 그저 열심히 공부하라고 했지, 시작부터 다른 출발선이 있음은 말해주지 않았다. 차분히 정직한 걸음을 내딛었을 학생들 옆에서 말을 타고 연대와 이대에 진학한 이들에게 세상살이가 얼마나 수월하고 즐거움으로 가득했을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들의 평소 행실이 안하무인(眼下無人) 네 글자로 정리된다는 사실이 별로 놀랍지 않다.

 

가짜 귀족 행세를 한 윌리엄은 결국 정체가 들통나고 곤경에 처한다. 하지만 그의 능력과 성품을 인정한 왕자의 자비로 윌리엄은 진짜 기사 작위를 받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다. “정말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어록을 떠올리게 하지만, 윌리엄의 인생을 바꾼 것은 결국 자신의 용기와 신념이다. 우주의 도움은 도통 보통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단다”

(If he believes enough, a man can do anything)

 

- 윌리엄 아버지의 대사 중 -

 

 

윌리엄의 정직한 이야기는 작은 여가로는 퍽 훌륭하다. 특히 요즘 같이 마음이 메마른 때라면 제법 웃긴 영화로 느껴질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도 <기사 윌리엄>은 히스 레저의 가장 익살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다. 조커의 이면에 감춰진 그의 편안한 연기를 만나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조금 맥락을 벗어난 이야기지만 내년 10월부터 퍼스 시티에 위치한 AGWA(Art Gallary of WA)에서 히스 레저의 소장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시작된다고 한다. 헷갈리지 말자, 정말로 진지하게 내년 10월부터다. 그가 사랑했던 퍼스의 여유로운 호흡을 즐기며 전시를 기다려 보는 건 어떨까. 긴 혼돈을 견디게 하는 것은, 마침내 꿈꾸던 날이 올 것이라는 확고한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