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여름 만들기, 8월의 크리스마스
2017. 1. 4.
부쩍 30도를 넘나드는 날이 많아졌다. 북반구 기준으로 이제 진짜 겨울이 왔다.
여기저기 성탄을 준비하는 장식으로 요란하고, 몇몇 집들은 영화에 나올 법한 화려한 조명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호주에 오기 전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는 영 분위기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산타 할아버지와 썰매, 가득 쌓인 눈 그리고 붉은 색으로 상징되는 성탄의 이미지와 퍼스의 바닷가는 도저히 머리 속에서 어우러지지 않았다. 12월에 맨발로 쇼핑센터를 누비는 오지들의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도 아직은 낯설다. 기분 좋은 목소리로 쇼핑몰을 홍보하는 산타클로스 직원은 겨울이 아니라 에어컨 덕분에 그 두꺼운 옷을 입고도 생생할 수 있을 것이다. 편견에 둘러싸여 어색한 와중에 시티에 나가보니 무더위 속 크리스마스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광장에 둘러 앉아 차가운 맥주와 음식을 나눠 먹으며 수다를 떠는 것이 여기서 연말을 보내는 방법이다. 비키니 입은 산타클로스면 어떠하랴. 그저 나가서 놀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씨다.
크리스마스하면 떠오르는 영화는 당연 <나홀로 집에>다. 극장개봉으로 3편까지, 이후 TV무비로 2편이 나와 총 5편의 라인업을 자랑하는 이 시리즈는 결코 죽지 않는 불사신 ‘케빈’ 신화를 만들어 낸 주인공이다. 위대한 ‘해리 포터’에게 성탄절 대표 영화의 자리를 빼앗기나 싶었지만 착각이었다. 욕하면서도 본다는 말이 꼭 알맞다. 틀림없이 올해에도 영화채널에서는 케빈을 만날 수 있고, 어김없이 재미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틀린다면 요즘 유행하는 장을 지질 수도 있다! 아 혹시나 “5편까지 나왔어?”라고 생각하며 시리즈 4, 5편을 찾고 있다면 잠시 멈추고 그냥 바닷가로 나가자. 4편을 맡았던 ‘로드 다니엘’ 감독에게 본 작품이 마지막 연출이 되었다는 씁쓸한 필모그래피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막연하게 한 10년 쯤 뒤에 약쟁이가 된 케빈(맥컬리 컬킨)이 도둑 역할로 등장하는 리부트 버전이 나온다면 좋겠다. 그 정도 기획이라면 박수 치며 관람할 준비가 되어있다. 역변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우리의 꼬마 영웅에게 돌아올 기회가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크리스마스 영화를 검색하다 보면 으레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한국영화가 함께 눈에 들어온다. 제목 말고는 성탄절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이 착한 영화는, 단지 흡연 장면 때문에 15세 관람가를 받은 것이 아닐까 의뭉스러울 만큼 밝은 빛으로 가득 찬 ‘슬픈 멜로’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주인공은 미소를 잃지 않는다. 죽음의 기운도 거스르는 정서와 분위기에 이 영화가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 담담한 속에서 이따금 터져 나오는 감정들은 대놓고 울어 제치는 신파보다 몇배나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영화 속에는 남녀주인공의 흔한 고백 장면도 없다. 스킨십이라고 해봐야 고작 서로 팔짱을 끼는 것으로 끝나는 이 요상한 멜로 영화는 지금 다시 개봉한다면 분명 ‘전체관람가’를 받기에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안다. 정원(한석규)과 다림(심은하)의 사랑은 그렇게 지금의 영화들과는 사뭇 다르다.
영화를 다시 보며 제목의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누군가는 한 남자의 사랑이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죽음으로 시들어 버렸다는 뜻이라고 한다. 생명의 계절인 8월(여름)과 소멸의 계절인 12월(겨울)의 대비를 통해 주제를 전달하는 것이라는 대입 수능 해설서 같은 말들도 있다. 이해는 가지만 정말로 그런 이유로 난해한 제목을 지었을까 싶다. 영화에서 ‘8월’은 딱 한 번 언급된다.
“아저씨 사자자리죠? 생일이 팔월 아니에요? 사자자리가 나랑 잘 맞는다고 하던데”
- 다림(심은하)의 대사 중 -
다림이 어떻게 생일을 알았는지, 이 질문에 정답이 있는지 영화에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저 넌지시 상대의 마음을 떠보는 고백이었는지 모른다. 7월인지 8월인지 알 수 없는 한 여름 나무 그늘 밑에서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으면서 그들의 사랑은 시작된다. 그렇게 연인은 산타클로스나 선물 없이도 그들만의 성탄을 맞이한다.
죽음을 앞에 두고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는 야속함 때문일까, 사람들은 이들의 사랑을 오래도록 기억한다. 그저 8월은 연인이 만나고 사랑을 시작한 계절일 뿐일지도 모른다. 달력이 무엇을 가리키던 시작하는 연인들에게는 언제나 크리스마스다.
극중 주인공 정원의 직업은 사진사다. 사랑도 사진처럼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사실을 담담히 고백하는 그도 사실은 잊혀지는 것이 싫어 사진을 찍었던 것은 아닐까. 스스로의 영정사진을 찍으며 자신이 오래 기억되기를 바랬고, 사진관 앞에 다림의 사진을 걸며 자신도 그녀를 오래 기억할 것임을 고백한다. 결코 메울 수 없는 사람의 빈자리를 추억이란 이름으로 사진이 채워간다.
호주에 올 때 큰 맘먹고 장만한 카메라가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다. 이 여름이 그저 추억으로 그친다 해도 사진을 많이 찍어두고 싶다. 단순무식 양으로 승부하기에 추억만큼 좋은 것이 없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1998년에 개봉했다. 촌스럽던 시대와 사람들은 오히려 이제와 멋스럽게 느껴진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지금 퍼스에서 조금 불편하고 어설픈 모습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멋스럽게 느껴질지... 오늘은 일단 카메라를 들고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