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장면/영화 보다

토르 감독의 힐링무비 추천, 헌트 포 더 와일더피플

5eadme 2018. 3. 29. 16:48

 

2017. 4. 22.

 

좁디 좁은 나의 식견 탓이지만 아직까지 ‘호주 영화’라는 범주에서 딱 떠오르는 작품은 없다. 

 

문득 위대한 망작 바즈 루어만 감독의 <오스트레일리아>가 생각나지만 제목이 <호주>라고 호주를 대표하는 영화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제는 가장 유명한 호주 남자가 된 ‘휴 잭맨’과 가장 유명한 호주 여자 ‘니콜 키드먼’이 주연이었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대표성은 있다고 봐도 무리는 없겠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보겠지만 물론 그때도 165분을 끝까지 버틸 자신은 없다. 다행히 최근에는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의 조지 밀러 감독이 노익장으로 호주 출신 감독들의 기를 살렸지만, 개인적으로 이제 영화보다 건강을 잘 챙기셔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더 굉장한 <매드 맥스> 속편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한국에까지 대중적으로 알려진 호주 영화는 아직 없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영어권 컨텐츠가 할리우드로 귀결되는 오늘날 당연한 결과지만 호주에 왔으니 최소한 괜찮은 남반구 영화 하나쯤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던 중 선댄스를 감동시킨 뉴질랜드 영화가 있다는 소식에 눈이 번쩍 뜨였다. 호주가 아닌 이웃집 영화라는 점이 좀 아쉽지만, 아름다운 뉴질랜드의 풍광과 함께 잠시 고된 일상에서 벗어나 보는 것은 어떨까.

 

<헌트 포 더 와일더피플>은 뻔한 스토리를 속도감 있는 장/막 연출과 유머로 버무려 제법 근사하게 만든 가족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부모 없는 아이 리키(줄리안 데니슨)가 뉴질랜드 외딴 숲 속 집으로 입양된 뒤 무뚝뚝한 삼촌 힉터(샘 닐)와 함께 의도치 않은 모험을 떠난다는 꽤나 단순한 이야기다. 픽사의 위대한 애니메이션 <업>을 그대로 베낀 듯한 스토리 라인과 똑 닮은 캐릭터들은 표절시비가 없었는지 궁금할 정도지만 이런 이야기의 기원을 찾는다면 기원전으로 거슬러 가도 부족할 것이란 점도 분명 사실이다. 

 

그래도 어디서 본듯한 부분들을 제쳐두고 영화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전혀 못본 듯한 뉴질랜드의 대자연 덕분이다. 여기로 가도 저리로 가도 평평한 서호주의 풍경이 조금 지루하던 중이라면 울퉁불퉁 와일드한 뉴질랜드의 숲과 계곡들은 퍽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래도 영화의 우리말 제목을 <내 인생 특별한 숲 속 여행>이라고 지은 것은 명백한 실수다. 수입사에서 확정한 결과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특별하지 않은 제목때문에 특별한 영화를 감상할 기회를 놓치는 관객이 없었으면 좋겠다.

 

영화의 주인공인 리키는 마오리족 소년이다. 고백하건대 퍼스에 오기 전까지는 마오리족은 물론 에보리진을 비롯한 폴리네시안 원주민에 대해 조금도 배경지식도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부족하지만 원주민 문제의 몇몇 원인과 결과들에 대해서 공부로 그리고 약간의 경험으로 쫓고 있는 중이다. 짧은 퍼스 생활을 통해 자유로운 더불어 자연에 가까운 삶을 향한 그들의 근원적인 동경을 어렴풋이 공감할 수 있게 된 것도 개인적으로 큰 정서적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으로만 보던 푸른 바다에 들어가 스피어 낚시를 하거나, 캥거루 뛰노는 초원에서 말을 타다 보면 문득문득 이렇게 ‘진짜’ 자연 속에서 사는 것도 참 괜찮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람에 치이던 해운대 백사장이나 고성방가 가득한 대성리 글램핑장에서는 느끼지 못한 감정들이다.

 

트러블메이커 리키는 도시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곳은 태어난 고향이지만 반겨줄 이가 없다는 점에서 고향이 아니고, 누릴 것들로 가득하지만 누릴 수 없다는 점에서 행복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말썽쟁이였던 소년은 계곡에서 노숙을 하며 자연을 배우고, 그 속에서 진짜 삶과 죽음들을 만난다. 잠깐의 일탈로 시작된 숲 속으로의 도주는 오히려 소년의 일탈을 멈추게 해주었다. 조금 삐뚤어진 두 남자를 넉넉하게 품어내는 뉴질랜드의 산과 호수는 일면 샘이 날 정도로 보는 이의 마음도 활짝 열어준다.

 

실제 영화의 배경이 된 뉴질랜드에서는 작년(2016) 박스오피스 전체 1위라는 놀랄만한 결과를 기록했다고 한다. 극장가를 주름잡았던 <모아나>도 <스타워즈:로그원>도 모두 이겼다. 홈 어드밴티지를 무시할 순 없겠지만 작지만 탄탄한 영화라는 사실을 숫자로도 증명한 셈이다. 노골적인 제목이 선입견을 만들지만 광활한 대자연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작은 공간도 꼼꼼하게 비춰주는 부지런한 프레임 덕분에 좁은 화면도 꽤나 알차다. 소년물다운 착한 유머와 얼빠진 악인들이 적절하게 영화의 완급을 조절하고, 특별히 공들인 마지막 추격씬은 어색하지 않게 영화의 장르를 확장하며 긴장감을 완성한다. 시종일관 거의 바보처럼 그려지는 악역들이 약간 옥의 티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넉넉한 여유로움이 이 영화가 가진 최고의 장점이기도 하다.

 

뉴질랜드와 선댄스를 잔잔하게 감동시킨 감독의 다음 행보도 역시 주목해보자. 마오리족 출신다운 예명을 가진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뜨는 연출가라면 피할 수 없는 자리인 마블(MARVEL) 영화의 제작을 맡아 <토르: 라그나로크> 감독으로 능력 발휘 예정이라고 한다. 와일드한 날것의 망치 액션이 기대된다. 폴리네시안의 후예답게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의 스토리도 본인의 솜씨였다고 하니 그 천재성이 좀 부러울따름이다. 저예산 답지않은, 하지만 저예산 이기에 더욱 꼼꼼한 미장센으로 <헌트 포 더 와일더피플>을 아름답게 물들였던 감독의 눈썰미가 기다려진다. 잊지 말고 챕터가 넘어가는 순간의 스틸컷에 빠져들며 영화를 감상해보자.

 

*업데이트

귀염둥이 아역 '줄리안 데니슨'이 <데드풀2>에서 중요한 역할로 나온다고 한다. 시골에서 영화찍다가 출세했네! 심통부리는 모습과 어리둥절한 표정을 참 잘 소화했었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역할일까? 감독이 <토르:라그나로크> 찍더니 할리우드에 꽂아준 것인가... 멋진 모습으로 나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