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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초보자들을 위한 찬가, 비기너스

특별한 장면/영화 보다

by 5eadme 2018. 3. 27.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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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너스 게이 커플 스틸컷

 

2016. 11. 3.

 

세상에서 자녀의 커밍아웃보다 조금 더 당황스러운 순간을 딱 하나 상상할 수 있다면 바로 부모의 커밍아웃일 것이다. 게다가 그 당사자가 일흔다섯살 먹은 영감이라면 상황은 더욱 난감하다. 암으로 아내를 떠나 보내고 44년의 결혼생활을 마친 할(크리스토퍼 플러머)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한다. 세상에 늦은 일은 아무것도 없다지만, 어머니의 죽음으로 머리가 복잡한 아들 올리버(이완 맥그리거)에게 이건 좀 곤란하다. 하지만 이 올드게이도 더 이상 자신을 속이고 살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 역시 이미 암으로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았다. 사람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진짜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고 한다. 완전히 망하기 전까지는 망한 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가 완전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퍼스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골라본 영화가 <비기너스(Beginners)>라고 고백하면 너무 속보인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식상하고 약간 창피한 이 선택은 분명 사실이다. 제목부터 솔직한 이 영화의 홍보 카피는 “시작이 서툰 당신을 위한 무비테라피”다. 퍼스행 편도 비행기 티켓을 끊고 떠날 날을 기다리던 나는 그 촌스런 홍보문구에 마음을 빼앗겼다. 1년 동안 떠나있는 것을 여행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회사를 그만두었으니 이건 분명 휴가도 아니다. 여행도 휴가도 아닌 스스로도 정의하기 어려운 떠남을 앞두고 시쳇말로 나는 꽤 쫄보처럼 굴었다. 월급 없는 인생과 낯선 곳으로의 첫 방문이 무서웠고, 나는 습관적으로 영화를 찾았다.

 

만 5년 가까운 직장생활을 멈추고 나는 퍼스에 왔다. 업무강도가 어마어마하다는 소문으로 요약되는 회사생활에도 나는 잘 적응했다. 하고싶던 일이었고 재미있었기 때문에 나는 무척 긍정적인 직장인이었다. 물론 때론 밤을 샜고 야근을 했다. 하지만 단점은 견딜 만 했고 장점은 즐길 만 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조금의 운이 더해져 나의 첫 사회생활은 무탈하게 흘러갔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던 가운데 나는 갑작스레 회사를 나왔다. 말하자면 나의 퇴사는 할의 커밍아웃 같은 것이었다. 다만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라 백수를 선언했고, 그처럼 준비된 상태는 아니었다.

 

할은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걸고 자신이 얼마나 완벽한 게이인지 증명하려 한다. 13살에 자신의 성정체성을 알아차린 그는 60년 이상의 시간을 기다린 셈이다. 준비가 길었기 때문일까. 영화 속에서 그는 퍽 성공적으로 그 목표를 달성한다. 서른살이나 어린 남자친구와 거침없이 키스를 나누는 그의 모습은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게이파트너를 찾는 구인광고를 작성하기도 한다. 할과 달리 준비되지 못한 백수인 나는 평일에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색했다. 열심히 일하는 법은 잘 알지만, 열심히 쉬는 법은 딱히 배운 적이 없었다. 

좋은 백수가 되는 일에도 적응과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퍼스에 와서 깨달았다. 특히 낯선 곳에서의 시작은 준비만으로는 부족했다. 퍼스의 겨울이 생각보다 춥다는 사실을 나는 공항에 도착해서 피부로 배웠다. 네이버 날씨는 온도를 알려줬지만 바람까지 신경 쓰라고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서핑을 꿈꾸며 여름옷만 잔뜩 챙겨온 나에게 지난 한달은 무척이나 긴 겨울이었다.

 

 

“일단 만나서 어떻게 되는지 봅시다

 

- 게이 파트너를 찾는 할의 구인광고 중 -

 

 

멋지게 제 2의 인생을 시작한 할과 달리 그의 아들 올리버는 헤어짐이 두려워 깊은 연애를 주저하는 소심남이다. 사랑하는 여자 애나(멜라니 로랑)가 떠난다는 말에 잡는 시늉조차 하지 못한다. 그는 찾아 나서기보다는 기다림에 익숙하다. 할은 선문답같은 사자와 기린 이야기로 아들의 그런 성격을 걱정한다. 어린시절 올리버는 항상 사자를 갖고 싶어했다. 그는 사자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 온 것은 기린이었다. 홀로 지낼지 기린과 함께 지낼지 선택해야 한다는 할의 질문에 올리버는 답한다.

 

 

“내가 기다린 것은 사자였어요”

 

 

그가 기다렸던 사자는 오지 않았다. 그의 소망이 틀어졌던 것처럼 인생은 자주 기대와 어긋난다. 퍼스에서의 내 하루도 그렇다. 중고차를 사는 일, 쉐어하우스를 구하는 일, 작게는 낯선 곳을 처음 찾아가는 일까지... 하루가 예정대로 흘러가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때때로 그저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하는 상황들 앞에서 난처하다. 답장은 늦고 약속은 어긋나고 네비게이션은 오락가락 이상한 곳으로 나를 안내한다. 언어때문에 생겨나는 작은 오해들은 덤이다. 어쩌다 시간이 붕 떠버리거나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나는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시에서 혼자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유난스럽게 군다.


 

올리버 “우리 이제 어쩌지?“

애나 ”나도 몰라”

올리버 “어떻게 되려나...”

 

 

영화같은 인생이라는 말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진짜 삶에는 대본도 없고 편집도 없다. 영화 속에는 삶의 뿌리를 이루는 작은 힘들이 감춰져 있다. 그건 밥을 지어 먹고 화장실을 가는 일이다. 그 간극이 영화를 영화 답도록, 현실의 인생을 인생 답게 만들어 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영화 같잖은 인생이기에 나는 영화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영화에 밥과 화장실은 없지만 낯선 시작 앞에서 어리둥절 헤매는 마음을 감싸 안는 작은 위로가 있다. 잘 몰라도 일단 저질러 보라는 대책 없는 응원도 있다. 헤어졌다 다시 만난 올리버와 애나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관계에 있어 여전히 초심자다. 하지만 때때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시 시작한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퍼스에서 계속 비기너인 나는 영화를 더욱 많이 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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