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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건너는 법, 맨 인 더 다크

특별한 장면/영화 보다

by 5eadme 2018. 3. 27.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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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인 더 다크 스틸컷

 

2016. 12. 20.

 

퍼스에 와서 부쩍 땀 흘릴 일이 많다. 처음 공항에 도착해 오지않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릴 때도 그랬고 낯선 일을 처음 시작한 지금, 손님 앞에서 작은 실수라도 할 때면 이마에 땀이 방울방울 맺힌다. 유례없는 서호주의 긴 겨울이 가고 드디어 여름이 왔다. 태양이 얼굴만 내밀면 공원으로 바닷가로 떠나는 현지인들을 따라해 봤지만 남은 것은 반만 그을려 핼쑥한 얼굴과 슬리퍼 자국이 새겨진 발등 뿐이다. 

 

운전을 하면서 창문을 열지 에어컨을 켤지 고민하는 날도 점점 줄어든다. 뙤약볕 아래 주차해 놓았던 차에 탔다가 안전벨트 버클에 팔뚝을 데이는 일은 분명 한국에서 경험하기 힘든 낯선 여름이다. 여름이 한껏 익으면 한국뉴스에서는 꼭 자동차 보닛 위에 계란후라이를 하는 실험을 하는데, 퍼스에서라면 BBQ파티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극장가에 공포영화가 하나 둘 걸리기 시작하는 것도 여름이 왔다는 신호다. 깜짝 놀라는 경험이 더위를 식혀준다는 과학적인 증거 어쩌고 하는 사실과는 별개로 한여름 극장나들이는 분명 적절한 피서(避暑)다. 

 

에어컨 빵빵한 실내에서 시원한 탄산음료 한잔이면 여름을 잊기 딱 좋다. 완전하게 암전(暗轉)된 상영관의 적막감은 묘한 서늘함을 주기도 한다. 기록적인 폭염 덕분일까, 올 여름 한국 박스오피스는 공포영화들이 제법 재미를 봤다. <컨저링2>같은 예정된 대박은 물론이고 <잔예>와 <사다코 대 카야코> 등 빛 바랜 영광을 회복하려는 일본 공포영화들도 개봉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나 이슈면에서나 올 한해 공포영화의 주인공을 꼽는다면 단연 <맨 인 더 다크>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전세계 극장가를 휩쓸며 제작비의 열 배가 넘는 금액을 회수한 이 영화는 벌써부터 속편 제작 소식이 들려온다.

 

어둠은 공포의 근원이다. 사람들은 무서운 얘기를 하기 전에 으레 조명을 끄고, 무서운 생각에 사로잡힐 때면 불을 켠 상태로 잠자리에 든다. 귀신이나 살인마가 어둠을 틈 타 나타나는 것도 정해진 공식이다. 한낮의 코테슬로 비치에서 서핑하는 유령 따위는 생각하기 어렵다.

 

쓰고 나니 문득 흥미로운 아이템처럼 보이지만, 만만해 보이는 유령은 반드시 망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최근 <고스트 버스터즈>에서 이미 배웠다. 공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다가와 영혼을 흔들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관객들은 눈을 가리면서도 손 틈으로 보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등줄기가 바짝 얼어붙는 독특한 서늘함에 매료된다. 그렇게 두려움은 유희가 되고, 사람들은 공포를 돈 주고 사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맨 인 더 다크>는 십대 빈집털이범들이 눈 먼 노인의 집을 털기로 결심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다. 답답하고 미련한 십대 주인공이라는 할리우드 하이틴 공포물의 공식은 여기서도 그대로 계승된다. 차이가 있다면 <맨 인 더 다크>는 어떻게든 깜짝 놀라게 만들겠다는 평범한 공포영화의 오류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각적으로 과하게 잔인함을 추구하거나, 극적인 음악을 활용하면서 억지 공포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공포의 도구는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어둡고 칙칙한 화면과 그 속을 종횡무진 누비는 눈 먼 노인이 전부다. 복잡한 트릭과 특수효과 없이 만들어 낸 짜릿한 긴장감은 날것의 공포를 느끼게 해준다. 겁에 질린 목소리로 등장해 쇼킹한 반전 매력을 보여준 배우 ‘스티븐 랭’의 맹인 연기는 두 말할 필요없이 이 영화가 만들어 낸 공포의 핵심이다. 눈 먼 자의 눈빛연기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진짜’ 무섭다.

 

시각을 잃으면 보통 청각이 발달한다고 하지만 <맨 인 더 다크>의 노인은 딱히 귀가 예민한 것은 아니다. 청력까지 민감했다면 사실 영화는 체 30분을 넘기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이해가 된다. 전혀 다른 장르지만 <나홀로 집에>의 내러티브를 빼다 박은 이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 고통받는 도둑들을 응원하게 된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철없는 좀도둑과 백전노장의 퇴역군인은 애초에 좀 불공정한 게임이었을까. 범죄자 흉내를 내던 평범한 인간들은 진짜 악인을 만나 속절없이 무너진다. 철저하게 시즌용으로 기획된 영화에서 메시지를 찾는 것은 과한 욕심이겠지만, 굳이 적는다면 딱 한마디로 정리된다. 

 

 

“인생은 실전이야 종만아”

 

 

호주에서 여름을 보내는 방법은 저마다의 색깔로 찬란하다. 긴 휴가와 크리스마스를 앞 두고 들뜬 마음들이 시티를 걷다 보면 나에게도 조금씩 스며든다. 퇴근하면 바다로, 풀장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그득그득한 곳에서 공포영화를 보며 여름을 나는 것은 좀 식상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이유를 떠나서도 <맨 인 더 다크>는 한번쯤 볼 만한 스릴러다.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적 구멍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끝을 향해 질주하는 이 영화의 영리한 에너지는 감상을 흥미롭게 해준다. 특히 짧은 상영시간을 더욱 짧게 느껴지도록 서스펜스를 다루는 힘이 인상적이다. 무서운 영화를 잘 못 보는 사람이라면, 올 여름 해가 내리쬐는 해변에 앉아 <맨 인 더 다크>를 감상하는 것은 어떨까. 참! 영화의 영제는 <Don’t Breathe>다. 부디 숨 쉬는 것을 잊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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