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 24.
인간생활의 세 가지 기본요소라는 의식주(衣食住). 요즘 한국의 청춘들은 실업과 고용불안 덕에 집(住)은 목표에서 자동 삭제되고 두 가지 만을 쫓아 살아가는 기적을 경험 중이다. 집을 살 수 없는 청춘들은 옷을 사며 스스로를 가꾼다. 세상에 내 집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건물 숲 사이에서 젊은이들은 맛집을 찾아 헤맨다. 노오-력과 이인-내라는 두 인물을 유독 존경하는 어떤 어른들은 철없는 짓이라며 혀를 찰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등 따실 곳이 없다면 배라도 부르자는 심보를 누가 나서서 욕할 수 있겠는가. 꿈과 더불어 집을 잃은 이들에게 잘 먹는 일의 중함을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호주에 와서도 집은 여전히 닿지 않는 먼 거리에 있다. 나아가 잘 입겠다는 생각도 진즉 포기했다. 나는 퍼스에 있다. 슬리퍼도 없이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도 지천이고, 형광색 작업복과 안전화 조합은 교복만큼 흔히 보인다. 바다로 뛰어 들 생각이라면 웻수트 하나면 충분하다. 소위 몸짱이라면 조금 ‘덜’ 입는 편이 오히려 자유로운 해변들이 넘쳐난다. 호주가 패션 감각이 떨어지기 때문은 아니다. 아! 쓰고 보니 이건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가끔은 아무리 쇼핑센터를 돌아다녀도 살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을 때가 있지만, 퍼스의 잘못은 아니다. 그저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굳이 차려 입을 필요가 없을 뿐이다. 딱 한 곳 카지노만 제외한다면 퍼스는 그런 곳이다.
퍼스에 온 뒤 나의 의식주에서 가장 향상된 분야는 먹는 것, 바로 음식이다. 양적 질적 성장을 모두 이루어 냈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한 변화다. 패스트푸드와 편의점 식품을 끼고 살던 한국에서의 식생활과는 비교가 불가하다. 정작 몸은 양적으로만 성장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뿐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뭘 사먹을까?” 고민했다면, 요즘은 “뭘 해먹을까?”를 고민한다.
솔직하게 고백하자, 여기서 일주일 동안 요리한 횟수가 한국에서 1년 동안 밥 지어 먹은 횟수보다 많다. 한국에서 우리의 550L 대형 냉장고는 오로지 생수와 냉동 과일을 위한 텅텅 빈 저장고 같았다. 큰 맘먹고 장만한 쿠쿠는 위대한 햇반에 밀려 데뷔도 못하고 창고로 들어갔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반 만한 냉장고 안에도 온갖 식재료와 향신료가 그득하다. 음식물쓰레기 봉투가 따로 필요 없다는 사실도 더불어 요리를 재촉한다. 전복따기, 게잡기, 낚시 등 수렵 채취 생활을 넘어서 이제는 깻잎 기르기, 미나리 심기를 욕심 내며 농경생활로 넘어가는 인류의 진화도 더불어 체험하는 중이다. 계란 값 파동으로 한국이 요란한 와중에 잘 먹는 얘기를 쓰려니 죄책감이 들지만, 건강한 식재료와 다양한 음식문화는 분명 빠질 수 없는 호주살이의 장점이다.
새해를 맞아 영화계에서는 골든글러브 시상식이 막 끝났다. <라라랜드>의 선전도 놀랍지만, 공로상 성격인 세실 B. 드밀 상을 받은 ‘메릴 스트립’의 수상소감에 특히 화제가 쏠렸다. 소감을 발표하라고 했더니 혼자서 영화를 찍고 내려온 이 배우는 다 쉬어 버린 목소리로 청중을 사로잡는 내공을 선보였으니 과연 공로상이란 이름에 부족함이 없다. 이제는 할리우드 대모가 된 메릴 스트립, 뛰어난 작품을 말하자면 끝도 없지만 나에게 그녀의 연기는 <줄리&줄리아>로 기억된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등 시대를 대표했던 로맨틱 드라마를 쓴 작가이자 감독 ‘노라 에프론’의 유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새로운 곳에서 요리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눈 여겨 볼만한 영화다.
"호주에서는 모두가 요리를 한다"
영주권을 따기 위해 쿠커리를 준비하는 사람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먹는 것이 비싸서 만들어 먹는다는 슬픈 논리에 빠지지 말자. 나의 칼 솜씨는 일취월장 중이니까.
영화의 주인공인 줄리아(메릴 스트립)는 뒤늦게 요리사를 꿈꾸는 철없는 여인이다. 주방에서 칼도 제대로 잡지 못했던 그녀가 어떻게 전설의 프렌치 쉐프가 될 수 있었는지 영화는 차근차근 발자취를 따라간다. 대책없이 긍정적인 사람을 볼 때 속 터지는 마음이 줄리아를 향해서는 떠오르지 않는다. 행복과 불행의 지점이 명확한 그녀는 주위 사람들을 감화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이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껑충 큰 키로 뒤뚱거리면서 어눌한 프랑스어를 자신 있게 내뱉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꽤나 즐겁다.
원조 쿡방 요정 줄리아 차일드의 성공이 영화화 되기까지는 실존 인물인 그녀의 독특한 캐릭터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더불어 그녀의 요리 레시피 정복에 도전하는 줄리(에이미 아담스)는 특유의 사랑스러움과 찡찡이 캐릭터로 극의 한 축을 단단하게 잡아준다. 시대를 달리하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을 자연스럽게 엮어내는 편안한 연출에는 감독 특유의 섬세함이 깃들어 있다.
무엇보다 <줄리&줄리아>는 요리에 관한 영화지만, 결국 사랑과 꿈에 관한 이야기다. 두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의 꿈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것을 요리에서 발견한다. 꿈이라는 요리의 완성에서 남편의 사랑이 빼놓을 수 없는 재료였다는 사실도 공통점이다. 요리는 그렇게 자신을, 혹은 주위사람들을 사랑하게 만드는 고리가 되어준다. 전화상담원으로 일하는 줄리는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들어와 초콜릿 케익을 만들며 마음을 다독인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하루를 보낸 그녀는 부드러운 초콜릿 무스가 주는 확실한 위로에 매혹되어 요리의 세계로 빠져든다. 행복은 때때로 달콤함 하나로도 충분하다. 집안 가득 풍기는 케익 굽는 향기의 안락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면 오늘은 베이킹에 도전해보자. 반죽을 섞고 생크림을 올리는 일의 행복은 직접 해보기 전에는 절대로 알 수 없다. 여럿이 함께 살고 있다면 더욱 추천할 만한 즐거움이다. 퍼스의 끓어 오르는 날씨와 바쁜 일과로 당 떨어진 이들에게 이보다 좋은 약은 없을 것이다. ‘줄리아 차일드’의 입을 빌어,
"모두들 Bon appét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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