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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미투(#metoo) 이야기, 히든 피겨스

특별한 장면/영화 보다

by 5eadme 2018. 3. 29.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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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겨스 스틸컷

 

2017. 4. 2

 

“미항공우주국(NASA)에 흑인 여성과학자들이 일하고 있다.”는 문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배경이 1960년대 미국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차별과 억압이 만연했던 당시의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어림짐작으로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걱정 할 필요는 없다. 피 흘리지 않고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도 있다. 

 

각자의 재능과 노력으로 수학, 엔지니어링 그리고 프로그래밍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세 주인공의 삶이 그것을 증명한다. 세 여인의 이력을 쓰고 보니 부모님 말을 듣고 이과를 갔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도 들지만, 문학도의 아쉬움은 이 리뷰를 잘 마무리하는 것으로 달래야겠다. 원래 가보지 못한 길이 더욱 끌리는 법이니까. 수학을 하기에는 이미 머리가 굳은 당신도 이 유쾌한 약자의 반란을 편안하게 소파에 기대어 감상하자. ‘여자’ 그리고 ‘흑인’ 이라는 검증된 약자의 콜라보레이션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유리천장을 걷어찬 이야기가 감동적이지 않다면, 보나마나 다른 영화들도 심심할 것이다. 

 

처음 들으면 100% 픽션인가 싶지만 영화 속 캐릭터는 모두 실존 인물을 근거로 각색했다. 냉전으로 우주개발 경쟁이 한창이던 당시 미국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유인우주선 발사 프로젝트 ‘머큐리 계획’에 일조한 흑인 여성들이 그 중심이다. 하지만 영화는 인류의 우주여행에는 큰 방점을 찍지 않는다. 그저 지상에 머물며 각자의 자리를 개척한 이들의 가족사(史)를 묵묵하게 바라본다. 큰 사건은 없지만 심심하지도 않다.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세 주인공의 이야기를 고루 배치한 균형감이 영화의 흐름을 지루하지 않게 만든 덕분이다. 

 

특히 수학 천재를 연기한 타리지 P. 헨슨(캐서린 役)의 잔잔하지만 폭발력 있는 연기는 미드 <엠파이어>를 통해 각인되었던 강렬한 인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증명한다. 옥타비아 스펜서(도로시 役)의 존재감은 두 말할 필요 없고, 특히 최근작 <문라이트>를 통해 얼굴을 알린 자넬 모네(메리 役)와 마허샬라 알리(짐 존슨 役) 커플의 등장도 반갑다. <빅뱅이론> 쉘든의 광팬이라면 영화 속 짐 파슨스(폴 스태포드 役)의 모습에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그 아쉬움을 뛰어넘는 글렌 포웰(존 글렌 役)의 능청스러움이 아쉬움을 달래줄 것이다.

 

수학, 과학, 엔지니어링, 컴퓨터, 로켓 등 남성적인 이미지가 범람하는 나사(NASA)라는 곳에서 이뤄낸 이들의 성공은 사실 영화처럼 유쾌하진 않았을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만으로는 견디기 힘들었을 차별의 전쟁터에서 흑인 여성 과학자들의 하루하루는 무척 고된 시간이었음을 확신한다. 그 앞에서 고개가 숙여지는 이유는 실제 인물들이 영화 속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고 평생을 ‘최초’라는 수식어를 개척하는데 바쳐왔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말미에 소개되는 세 여인이 현실에서 이뤄낸 결실들은 일면 영화보다 놀랍고 감동적이다. 98세의 나이로 아직 정정하다는 캐서린은 심지어 인터뷰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더 잘하고 싶었을 뿐이라며 겸손하게 말한다. 스스로의 일에 하나씩 집중했다는 그녀의 말처럼 시위를 위해 광장으로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싸워야 하는 현장은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도 있다. 차별은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모두가 변해가야 한다.

 

지난 경험들에 비추어보면 걱정이 좀 과했다는 우스운 생각도 들지만 퍼스에 오기전 나의 가장 큰 고민도 ‘인종차별’이었다. 인터넷에는 호주에서 겪은 생생한 인종차별 후기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고, 다른 세상과는 좀 동떨어진 듯한 서호주의 특성상 아직까지 인종차별이 많이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분명 호주는 불과 40년 전까지 공식적으로 유색인종의 이민을 제한해 왔던 나라다.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라는 이름의 얼핏 들으면 약간 멋있게 들리기도(?)하는 이 정책은 말그대로 백인을 우대했던 호주만의 인종차별법이다. 유독 ‘오리지널리티 없음’에 민감한 호주가 가진 나름의 전통 있는 악법이라고 해야할까.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이어왔던 정책인 만큼 그 유무형의 흔적들이 아직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것은 분명하다. 꼭 거창한 것만이 차별은 아니다. 무례한 응대부터 저임금 노동착취까지 그 범위와 모습을 달리하며 존재한다.

 

결론적으로 누군가 퍼스는 인종차별이 심한지 지금 묻는다면 나의 답은 “아니요”다. 하지만 언어 문제에서 오는 오해(misunderstanding)라고 스스로 납득하고 지나간 사건들 속에 사실 온건한 ‘차별’이 숨어 있었음을 안다. 나는 애써 모른척하곤 했다. 백인만을 위한 학교에 처음으로 가기 위해 법정에서  권리를 주장하던 ‘메리(자넬 모네)’의 주장은 그래서 더 감동적이다. 부당한 것을 모른 체 한다면, 잘못된 것을 눈감고 지나 간다면 누군가는 또 똑같은 차별과 부딪히게 될 것이다. 결국 차별의 철폐는 용기 있는 수 많은 ‘처음’과 '공감(미투)'들이 모여서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이제 미국은 광범위한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고, 호주의 백호주의도 공식적으로는 1978년 이후 폐지되었다. 그 결정에 경제논리가 숨어있다는 평가가 뒤따를지 언정, 평등한 세상을 꿈꾼 수 많은 ‘캐서린, 도로시, 메리’들의 노력이 있었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물론 단지 평등해지기 위해서 꼭 특별해야 하는 것인지 좀 머리 아픈 문제는 남는다. 외모와 성별에서 오는 억압을 극복하는 방법이 특출 난 능력뿐이라면 진정한 의미의 평등과는 아직 좁히지 못한 거리가 있다. 작은 시작이지만, 명문화된 차별은 사라졌다.

 

Please don’t lose your humanity!

 

이제 그 대상은 일상 속에서 은밀하게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자리한 편견들이다. 인종, 성별, 음식, 언어 어떤 것이라도 일상 속의 작은 차별들을 애써 외면하지 말자. 혹 불편함을 느꼈다면 분명하다. 당신의 리스닝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녀들처럼 특별한 능력도 필요 없다. 그저 쉬운 문장을 하나 외웠다가 차별이 일상이 된 사람을 만난다면 살짝 말해주자. Please don’t lose your humanity. 영화의 제목처럼 우리 모두가 일상 속의 숨겨진 영웅들(Hidden Figures)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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