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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부르는 말의 힘, 킹스 스피치

특별한 장면/영화 보다

by 5eadme 2018. 3. 30.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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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스피치 스틸컷

 

2017. 6. 19.

 

말의 힘을 실감하고 있다. 

 

호주에 왔으니 제대로 승마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새정부의 주요 각료들을 인선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말’ 때문에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능력과 평판을 두루 갖춘 인물이 과거의 말실수가 드러나 큰 일을 그르치기도 하고. 혹은 기꺼이 옳은 말만 하다가 변방으로 쫓겨났던 인사의 금의환향도 흥미롭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대통령의 따듯한 ‘말’로 위로 받고, 혹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나름의 거친 ‘말’들로 운신의 폭을 그리고 있다. 저마다의 목소리가 범람하고 가짜 기사와 진짜 기사의 경계가 허물어져 돌아다닌다. 정치 뉴스가 이처럼 재미있을 때는 극장에까지 발길이 미치지는 않는 법이다. 칼럼을 준비하며 철 지난 영화들을 뒤적거리다가 <킹스 스피치(2010)>를 다시 보았다. 이번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말의 힘’과 연결 짓기 좋겠다는 잔머리도 굴렸다.

 

말더듬이 왕 버티(콜린 퍼스)와 언어치료사 로그(제프리 러쉬)의 우정을 역사의 소용돌이와 영리하게 엮어낸 좋은 영화였다는 기억이 선명하다. 되짚어 보면 그해 아카데미에서 상당히 주목받았었다는 점과 콜린 퍼스의 명연이 빛을 발해 남우주연상을 거머 쥐었다는 사실이 희미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물론 이제는 <킹스맨>으로 강인하게 기억되는 그의 이미지 덕분에 감상 초반에는 어색함을 느꼈을 정도로 긴 시간이 흘렀다. 행복한 기억의 망각 덕분일까 다시 보니 처음에는 주목하지 못했던 몇 가지가 진하게 와 닿는다. 

 

첫째로 영화 속에서 짧게 나마 이곳 ‘퍼스’가 언급되지만 전혀 기억에는 없다는 점. 

둘째는 영화 속 여인들의 연기가 매우 인상적이라는 사실. 마지막으로 ‘왕의 연설’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건 이 영화가 사실은 상처받은 과거를 가진 개인의 트라우마를 살피는데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퍼스는 이 영화의 두 주역 중 하나인 라이오넬 로그가 과거 연극을 했던 극단이 있는 곳으로 나온다. 퍼스에도 극장이 있냐고 묻는 오디션 관계자에게 “Enthusiastic(아주 열정적이죠)”이라고 답하는 그의 모습이 당당하면서도 1900년대 중반 호주를 낮잡아 보던 영국인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장면이다. 영국인도 호주인도 아닌 내가 그들 사이에 흐르던 편견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퍼스에 와 살고있는 지금, 영화 속에 호주에 대한 무시가 무척 짙게 담겨 있었음이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는 유명 광고문구가 내 안에서 묘하게 설득력을 얻는 느낌이다. 다행히 로그는 뻔뻔하고 기죽지 않는 기개를 가진 인물이다. 어깨를 바짝 펴고 리듬감 있게 걷는 그의 움직임은 마치 연극 무대같은 이야기의 주요 배경과 효과적으로 어우러진다. 장애를 가진 인물을 연기해야 상을 받는다는 오스카의 공식 덕에 수상은 콜린 퍼스가 했지만 제프리 러쉬 역시 남우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된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한다.

 

<킹스 스피치>는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 당시 최다인 12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 저력을 보였던 영화인만큼 하나하나 뜯어 볼만큼 많은 매력을 가졌다. 효과적으로 시대를 재연한 의상과 미술팀의 고생이 눈에 훤하고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버티의 호흡을 따라 그려낸 장면 편집도 일품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헬레나 본햄 카터의 인상적인 정상인(?) 연기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비록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라 객관적인 지표에서도 인정받는 정말 ‘평범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할리우드 답게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남편이었던 팀 버튼 감독의 페르소나이자 개성 있는 연기의 대명사인 그녀이기에 이런 드라마에서 만나는 기회가 오히려 흔치 않다. 

 

‘평범한’ 연기란 그녀의 연기가 교과서적으로 아주 훌륭했다는 큰 찬사이다. 말더듬이 왕의 아내 퀸 엘리자베스 역을 맡아 편안하면서도 권위를 잃지않는 지혜로운 왕가의 여성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개성 있는 마스크가 꼭 가분수의 마녀같은 캐릭터에만 어울리는 법은 아니다. 왕의 첫 전시 연설을 들으며 마음을 졸이다 긴장이 풀어져 눈물을 살짝 머금는 장면에서는 그녀의 눈이 담을 수 있는 이야기의 폭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헤아려보게 한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원치 않는 왕의 자리란 것이 있을까 싶다. 그 위상이 과거와는 다르다 해도 여전히 왕이란 모든 개인적인 성공 그 너머에 있는 절대적인 무엇이 아닌가. 지금은 허울 뿐이라 할지라도 그 이름 자체로 왕이라는 자리의 무게는 여전히 가볍지 않다. 그래서인지 영화속에서는 물론 실제로도 이혼녀와의 결혼을 위해 왕위를 내려 놓았던 버티의 형 에드워드 8세(가이 피어스)의 모습은 무책임해 보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마음이 가기도 한다. 스스로 행복하지 않은 왕이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으리란 사실은 너무도 자명하다.

 

오히려 조지 6세, 버티는 왕이 되기에는 조금 여린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로그에 따르면 전형적인 후천적 말더듬이인 그는 항상 말을 더듬는 것은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생각할 때나, 혼잣말 할 때, 혹은 화가 났을 때는 말을 잘 더듬지 않는다. 남들 앞에 섰을 때, 스스로 자신 없는 상황을 만났을 때, 그리고 당황했을 때 말문이 막힌다. 그는 왕위를 포기한 자신의 형보다 조금 더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조심스럽고 예민한 인물이었다. 그의 천성 때문에 말을 더듬었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오히려 좋은 왕, 훌륭한 정치인이 되는 밑거름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이의 말을 들어주는 것처럼 중요한 정치인의 덕목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왕이어서 말을 듣는게 아닙니다. 당신이 말을 하니까 듣는겁니다.

- 라이오넬 로그 -

 

최근 런던의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가슴 아픈 참사로 호주의 언론들도 앞다투어 사건의 경과를 보도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일어난 영국의 가장 큰 스캔들 중 하나라는 말처럼 사고의 파장이 예사롭지 않다. 그런 와중에 사고 현장을 방문했던 메이 총리와 엘리자베스 여왕의 모습의 엇갈린 행보가 다시금 대표자의 덕목을 생각나게 한다. 영국 왕실과 내각을 하나의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저마다의 방식으로 국가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영국 국민들이 거는 기대는 비슷할 것이다. 

 

사고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이야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위로의 ‘말’은 저마다 다른 형태로 각자의 몸짓과 눈빛을 함께 타고 전달된다. 라이오넬이 버티에게 몸짓 훈련을 시켰던 이유도 말이란 그것을 담아내는 몸의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메이 총리의 말과 몸짓에서 진심을 읽기 어려웠기에 사람들은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속에서 한국의 지난 상황이 묘하게 데자뷰 되기도 한다. 그저 안좋았던 결말까지 겹쳐지지 않기를,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위로의 말이 가진 힘과 더불어 기적같은 소식이 전해지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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